절집공부

몽초(夢草) 인홍스님

大坤 2020. 3. 2. 07:22

44.몽초인홍 - 불교신문

일제강점기 통도사의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쳤던 몽초인홍(夢草仁弘, 1870~1947)스님은 후학들을 제도하며 외길을 걸었던 수행자이다. 속성을 붙여 ‘허몽초’로 널리 알려진 스님의 행장은 그 명성에 비해 전해져 오는 내용은 극히 일부이다. 몽초스님의 수행일화를 상좌 화산(華山, 대구 보광선원 조실)스님의 증언과 <증곡집(曾谷集)> <축산집(鷲山集)> <삼소굴 일지>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어려움 만나면 정성껏 기도하며 헤쳐가라” 

  
  근세 통도사 대강백으로 ‘명성’ 

내외전과 참선 교학 두루 경비

○…몽초스님의 본래 법명은 인홍(仁弘)이다. 은사가 누군지 정확하지 않지만, 주로 주석했던 통도사 자장암과 인연 있는 스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홍이란 법명은 출가 당시 은사에게 받은 것이며, 몽초(夢草)는 스스로 지은 당호이다. 당호에는 사연이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불가(佛家)에서는 신년초가 되면 스님들이 영험 있는 도량을 찾아 정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명필가로 유명했던 몽초스님의 친필. 경봉스님에게 보낸 서한으로 참선 수행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출처=‘삼소굴 소식’

몽초스님도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서 ‘정월(正月)기도’를 하게 됐다. 기도 회향 무렵 덩치가 큰 말이 한 마리 나타났다. 다른 이들은 말을 타는 것을 꺼렸지만 스님은 주저 없이 말 등에 올랐다. 그러자 말은 큰 울음소리를 내며 초원으로 달려갔다. 꿈이었다. 이후 스님은 “꿈에 말을 타고 풀밭을 달렸다”는 의미에서 ‘꿈 몽(夢)’과 ‘풀 초(草)’를 넣어 몽초라는 당호를 지었다. 

○…청도 운문사에서 기도를 회향하고 돌아온 몽초스님은 은사를 비롯한 문중 어른들에게 꿈 이야기를 전했다. 다 듣고 난 문중 스님들이 “아주 좋은 길몽이다. 인홍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면서 문도 소유의 땅을 흔쾌히 내 놓았다. 그렇게 마련한 ‘논 8마지기’는 스님이 교학(敎學)을 연찬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몽초스님 상좌인 화산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공부할 때 그 같은 꿈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당시 몽초스님의 말을 전했다. “기도를 하면 신심이 나고,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으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정성을 다해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해라.”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는 스님들도 학문에 밝아야 양반들이 무시하지 않았다. 이 같은 분위기가 구한말까지 이어져 몽초스님은 내전은 물론 외전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음양서와 지리학도 공부를 하여 마을 사람들의 상담자 역할을 담당했다. 스님이 주석하던 통도사 자장암에는 주민들이 찾아와 고충을 토로하는 일이 많았다. 화산스님의 기억에 따르면 살림의 큰 밑천인 소가 사라져 막막해진 주민들이 달려와 상의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고민을 듣고 난 몽초스님이 어느 방향으로 가면 소가 있는지 알려주었다. 방편으로 솔잎을 떼어 방향을 찾는 흉내를 내기도 했는데, 스님이 시킨 대로 하면 대부분 소를 찾았다고 한다. 제자들이 그 같은 스승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몽초스님의 꾸중을 감수해야 했다. “이 녀석아, 뭘 디다보나, 저리 가그라.” 불호령에 머쓱해진 제자에게 스님의 경책은 계속됐다. “중은 이런 거 하는 거 아니다, 나는 할 일이 없고 심심해서 책을 보았을 뿐이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물으니 어쩔 수 없이 답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거 하면 안 된다.”

 

○…몽초스님은 1890년 예천 용문사 강원에서 구하(九河)스님과 함께 공부를 했다. 당시 용문사는 ‘영남 제일 강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한때는 용문사에 500명의 스님이 모여 50일간 담선회(談禪會)를 열었을 정도로 큰 도량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용문사의 살림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곤궁했다.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큰 불공이나 재가 있는 날 나오는 별식(別食)을 손꼽아 기다리며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자주 있었다.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특별 공양은 ‘된장’이었다. 얼마나 맛 있었는지, 당시 학인들은 “나중에 주지 등 소임을 맡으면 된장을 실컷 먹을 것”이라며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화산스님 기억에 따르면 몽초스님은 키가 경봉(鏡峰)스님 정도였을 만큼 컸다고 한다. 장대한 체격의 몽초스님은 성품이 엄격하고, 후학을 지도하는데 ‘호랑이’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개야 이리 와 봐라”라는 음성이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쏜살같이 달려와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엄중한 경책’을 감수해야 했다. 글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눈물이 쏙 나게 혼났다고 한다. 

○…그러나 엄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냉랭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몽초스님이다. 화산스님은 3년간의 행자시절 은사스님과 같이 눈물을 흘렸던 일이 있었다. <서장>에 실린 동산양개 화상의 사친서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동산양개 화상이 모친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아들과 천륜을 담은 어머니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있다.

“어머니는 이별의 정을 쉬고 그 마음을 거두어 도를 생각하십시오. 금생에 인간 세상 잠깐 가는 꿈같은 이 세상 그 정념에 끌려 세속에 가서 살게 되면 서로 어두운 오취생사 중에 빠질 게 아닙니까? 다음 부처님 회상에 가서 만납시다.” 이 대목에 이르러 화산스님은 울음을 터트렸고, 은사 몽초스님도 눈물을 감추려는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몽초스님은 출가 수행자가 되어 마음을 비우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문이 되어 사문의 정신을 잃고 산다면 출가의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명예와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이라고 했다. 다음은 몽초스님의 생전 육성이다. “중노릇을 잘 해야 한다. 너의 마음에는 ‘중마음’이 있어야 한다. 도둑놈 정신 갖고는 중노릇 못한다. 중마음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욕심내지 않고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니라.”

<사진> 근세 대율사 해담스님이 몽초스님 회갑을 맞아 쓴 축시. <증곡집>에 실려 있다. 

○…노년에 병석에 눕게 된 몽초스님. 왔으면 가야하고, 태어났으면 떠나는 것이 인생의 진리이고, 자연의 이치로 스님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세수 80을 바라보던 1947년 1월. 제자들을 불러 모은 스님은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며 마지막 가르침을 전했다. 몽초스님은 “부도와 비를 절대로 세우지 말고, 장례는 지극히 검소하게 치르며, 다비한 후에는 남은 재마저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유훈을 남겼다. “나를 위해 장례를 치르고 부도와 비를 세울 비용이 있으면,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사용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마지막 가는 길 조차 출가자의 본분을 보여주었던 몽초스님이다.

몽초스님 관련 시 / 


몽초스님은 통도사의 대강백으로 많은 스님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 가운데 구하스님과 해담스님이 몽초스님을 위해 쓴 시를 소개한다. 구하스님의 시는 <축산집>에 실려 있는 글이다. 해담스님의 시는 <증곡집>에 있는 것으로 법광스님(전 백양사 강주)이 풀이했다. 


丁亥正月初七日 夢草和尙 入寂輓(정해정월초칠일 몽초화상 입적만) 

童年垂老佛門住(동년수노불문주) / 禪敎同窓說話隨(선교동창설화수) / 疑是病床摩詰到(의시병상마힐도) / 竟非眞相苦知(경비진상고금지) / 時時莫逆平生志(시시막역평생지) / 力力那堪永訣思(역역나감영결사) / 萬里黃泉君獨逝(만리황천군독서) / 歌又錫一篇詩(해가우석일편시) 

어려서부터 늙도록 불문(佛門)에 머무셨기에 / 선교(禪敎)의 동창 되어 이야기하며 따랐도다 / 유마 거사 경지에 이른 스님의 병상(病床) / 괴로운 신음이 결코 참모습이 아니었네 / 평생 어느 때나 세운 뜻 거스름이 없이 / 공부에 힘썼으니 어찌 영결(永訣)을 생각했으리 / 머나먼 황천길을 스님 홀로 떠나시니 / 상여 소리와 함께 한 편의 시를 짓노라 


夢草禪伯 睟宴(몽초선백수연)

夢畔無根一莖草(몽반무근일경초) / 重逢 劫外春(중봉겁외춘) / 重逢春大岸上(중봉춘대안상) / 橫笛倒牛出格人(횡적도우출격인) / 頭醉倒(전두취도이라라) / 驀地着肩只舊親(맥지착견지구친) / 一笑放歌舞(일소방가무) / 日西兮月又新(일측서혜월우신) 

꿈속 뿌리 없는 가지에 / 겁외의 봄이 왔도다! / 온 세상 가득 / 피리소리에 누워버린 소(無事閑人) 그대는 출격장부(出格丈夫) / 헝클어진 머리에 취한 채 흥얼대다 / 엎어져도 땅 또한 옛 친구 같구나 / 한바탕 웃으며 춤추다 보니 / 해는 서산에 기울고 달이 떠오르도다

행 장 /

“부도는 세우지 말고 어려운 사람 도와라”
 

1870년 가을(9월 또는 10월경)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허 씨(許氏)로, 속명은 전하지 않는다. 어려서 양친과 사별한 후 형님 댁에 의탁해 지내며, <천자문>과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한학을 공부했다. 

어떤 이유에서 출가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8세 무렵 고향 인근에 있는 양산 통도사로 입산했다. 출가 당시 은사는 명확하지 않으며, 이때 받은 법명이 인홍(仁弘)이다. 몽초(夢草)란 호는 스스로 지은 당호(堂號)이다. 출가 이전에 한학을 공부한 스님은 내전(內典)을 익히는데 두각을 나타내, 훗날 대강사로 명성을 떨쳤다. 1890년 구하스님과 함께 예천 용문사 강원에서 공부한 이력이 있다. 이때 용문사 강사는 용호해주(龍湖海株)스님이다. 

내외전을 두루 겸비한 스님은 통도사 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했는데, 이때가 1930년대로 추정된다. 상좌인 화산스님이 1935년 통도사 자장암으로 출가했을 무렵 몽초스님은 대강백으로 존경 받으며, 학인을 가르치고 있었다. 

몽초스님은 대부분 통도사에 머물며 시문은 물론 선지(禪旨)에도 높은 경지를 보였다. 구하.해담(海曇).경봉(鏡峰) 스님 등 통도사 선지식들과 교류했으며, 노년에는 몸이 불편해 병석에 있었다고 한다. 

몽초스님은 해방 후인 1947년 1월7일(음) 통도사 자장암에서 “부도와 비 등 아무것도 세우려거나 남기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이때 스님의 세수 77세, 법납 60세였다. 

제자로는 춘삼.영일.봉곡성학.봉달.안영호.화산 스님 등을 두었다. 부산에서 교직에 종사하며 교장까지 지낸 이종원(李鐘元) 선생은 환속한 상좌이다. 몽초스님 말씀에 따라 후학들은 진영과 부도.비 등을 모시지 않았으며, 한시 등 스님의 글을 담은 ‘문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대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93호/ 1월17일자]